조운(漕運)
현물로 수취한 각 지방의 조세를 선박으로 왕도까지 운반하는 조직. 조전․조만․해조라고도 부른다.내륙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 수운 또는 참운이라하여 해로를 이용하는 해운과 구별하기도 한다.운수방법에는 해운과 육운이 있으나, 육운은 도로망의 불비, 운송수단의 제약 등 요인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일찍부터 해상교통에 크게 의존하여왔다.그런 데다가 중앙집권적인 왕조지배체제 밑에서 지방물자의 중앙조달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에 조운의 비중은 그만큼 컸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지방의 세곡을 수송하기 위하여 강변에 수운참, 해변에는 애운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모으고 선박을 항상 준비시켜두어 매년 일정기간을 정하여 중앙의 경창에 수송하였다. 또한, 조운에는 출발지점․기항․도착지점이 각각 있어 이세 지점을 연결하는 선이 조운항로이며, 출발지와 도착지에 있는 창고가 조창 또는 수창이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조운이 제도족으로 완비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토의 확장에 따라 9주5소경제가 확립되었으며, 지방관의 파견으로 그 통제도 가능하여졌고, 중앙관제도 678년(문무왕 18) 종래의 병부로부터 선부가 독립된 것 등으로 보아 국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상황하에서 해운 구실이 커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세곡의 조운은 군현제의 정비, 고려 왕조의 지배력강화와 더불어 틀을 갖추어갔다.건국 초기의 집권층이 지방통제에 역점을 둔 것은 일반행정보다 오히려 수취체제의 정비에 있었는데, 그것은 수취체제가 집권층의 생명선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방관의 파견에 앞서 금유․조장 등의 임시조세징수관을 파견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지방은 강대한 호족들의 자치적인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금유․조장의 임무는 그 지방호족들이 이미 징수해놓은 것을 수집, 보관하는 임시수세감독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에 의하여 수납된 조세는 다시 전운사의 감독하에 중앙으로 운송되었다. 그뒤 성종 때 지방관제개편과 더불어 조운기구가 구비되었다. 992년(성종11)세곡운송을 위하여 소요되는 수송선박의 수경가를 정하고 60여곳에 포가 설치되었는데 경상도로부터 황해도에 이르는 서남연해지방과 한강의 연번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이 포들은 조운선을 구비하고 조운의 거점으로 삼았다. 각 군현이 세곡을 부근의 포로 보내면 그곳에서 조운선에 의하여 개경으로 운송하였던 것이다.또, 이들 포는 군현의 하부행정기구로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군현은 신라말 이래 지방호족의 거주지로서 지방통제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포와 조운선을 장악하고 있어 조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성종 때에 들어와 지방행정기구의 개혁․정비가 본격적으로 착수되면서 지방호족에 대한 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포에 대한 왕조의 통제력이 강화 되면서 포가 관장하던 조운도 점차 국가가 장악하게 되었다.한편, 부계와 동계에는 포를 설치하지 않았는데 이곳은 외적과 맞닿는 국방상 요새지로서 이지역의 세곡은 군량으로서 충당하기 때문에 개경까지 조운할 필요가 없었다.고려시대 조운의 국가적 제도화는 조운의 거점으로 조창을 설치한 데서 비롯된다.
조창제 성립은 왕권의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하였으나, 성종 때부터 본격화한 군현의 정비가 대략 현종 때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면서 남도에 충주․원주․아주․부성․보안․임피․나주․영광․영암․승주․사주․함포 등 12조창이 설치되고 이어서 문종 때 서해도에 안란창이 설치되어 조창제의 골격이 완비되었다. 고려의 조운제는 이 13조창제를 내용으로하여 유지, 발전되었다. 고려시대 조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고 일종은 행정구획이었다.조창이 이슨 포나 부곡은 한 개의 촌락으로서 군현예속 행정기구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곳의 주민은 조창민으로 조운에 관계되는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였다.조창의 주요기능은 지방에서 징수된 조세를 11월초부터 다음해 1월까지 집적하고, 2월부터 시작해서 가가운 곳은 4월, 먼곳은 5월까지 경창에 조운을 마치도록 규정하였다.또한, 기한은 엄수되어야 하였고, 만약 난파되었을 경우 인솔관리․향리 그리고 사공인 수수가 함께 책임을 지고 변상해야 하였다. 조운경로는 서남해안과 한강수로이며, 목적지는 개경 교외에 잇는 동강․서강이라고 불리는 항구이다. 납입대상은 좌창․우창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좌창은 동강에 있고 운반했던 세곡을 그대로 납입하였다.우창과 기타 개경내의 제창에는 양강에서 일단 육지로 운반한 다음 육운으로 납입시켰다. 조세 이외에 전시과에 의하여 분급된 사전조도 운잔의 대상이 되었다. 조창은 수세 대상지역에 고루 분포되었으나, 개경 주변지역은 경창으로 직납함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설치하지 않았다. 조창은 관관․향리․조창민으로 구성되었다. 관관은 중앙에서 파견한 외관으로 조창의 감독관이었다. 색전이라 불린 향리는 조창민으로 조창내의 행정전반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관관의 감독하에 조창민을 동원하여 조창 본래의 기능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조창민은 향리의 통솔을 맏는 초공․수수․잡인등 조운선승무원으로 조운의 실행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군현민보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낮은 천민신분에 속하였으며, 조창민으로서 국가가 부과하는 역에 종사해야만 하였다.비록 사리를 꾀할 수도 있었지만, 항해중 조난의 위험성, 적하물의 파손변상, 경창측의 비리 등이 존재하고 있어 고된 역이었다.고려 후기 정치적․사회적 변동과 그로 인한 지배체제의 동요는 조창제도에 크게 변동을 가져왔다.특히, 조창제의 존립기반을 이론 군현제의 변혁, 삼별초난, 왜구 침입등은 조운제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지금까지 국가제도로서 집약적이었던 것이 각 지방의 군현이 주관하는 분산적인 것으로 성격이 바뀌어져 갔다.즉, 바다나 하천에 인접한 군현은 각자 스스로가 조운선을 구비하고 세곡을 운반해야 하였으며, 민간인에게 청부를 맡기는 곳도 나타났다. 조운제가 동요되면서 국가 재정이 위협받게 되자 국가에서는 원관을 설치하여 육운하고자 하였으나, 육운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고, 조운은 그 운영이 곤란하여져 마침내 1376년(우왕2)에 는 조운을 정지시켰다.그뒤 1390년(공양와 2)에 정몽주의 건의에 따라 내륙의 수운을 부활시키고 충주에 좌수참을 두어 남도의 세곡을 경창에 운반하도록 하였으며, 배천에 우수참을 두고 해서지방의 세곡을 경창에 운반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고려말 왜구의 침입등으로 파괴된 창고의 보수와 증설로 조운활동을 빠른 시일내에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국초에는 서해안의 조창으로 예성강구로부터 남해안 섬진강구에 이르는 해안 9곳에 조창을 설치하였으며 그밖의 곳은 조선 후기 영조 때에 이르러 설치를 보게 되었다. 한편, 평안도․함경도․제주도는 세곡을 조운하지 않고 각각 해당 도에서 그대로 보관하였다.이 조창의 관리를 위하여 감납차사원․분재차사원․해운관관․수참관관 등을 두어 각 조창에서의 조세수납과 반출을 감독, 관리하게 하고 그 아래 서기 이하 몇 명을 두어 창고행정을 맡겼다.또, 창고는 3년․5년 또는 10년마다 각각 이를 감독하는 감독관이 물품조사를 하여 그 부정여부를 검사하였고, 재고품의 보존처리가 적법한지를 조사하였다. 한편, 세곡을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하여 법규를 매우 엄하게 하였다.매 선박에는 600석을 한도로 적재 하게 하였고, 매 운에는 30척을 1종으로하여 순차로 운항하게 하였다.또 연변의 읍에서는 읍계,서초 등에 표지를 하고 수로를 잘 아는자를 태워서 지휘하게 하였으며, 보령․원산도 태안 안흥령에서는 중간 검열을 한후 경강에 도착하면 호조의 당상․낭관이 친히 점검하여 수남 하였다. 만일 조운선이 난파하면 그곳 지방관이 지체없이 즉시 이를 구제하고 피해미곡을 건조해야 하였으며, 2일 이내에 현지에 나타나지 않거나 좌수․별감을 대신 보내는 자 등은 처벌되었다.또, 고의로 파선하게 한 자, 10석이상을 훔친 자는 효시에 초하였다. 그런가 하면 50척 이상을 무사히 수송한 압령관은 직계를 올려 논상하고 3척 이상을 패몰하게 한자는 치죄하는 규정을 법제화하였다. 또 조창에 수납된 세곡은 모두 경창에 집결되었으니 서울 남부 한강변에 설치된 자창․풍저창․광흥창이 그것이다. 조운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국가관리하에 대규모의 조선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태종 때 많은 조운선이 건조되었으나 잇따른 해난사로 피해가 극심하여 세종 때 관선대신 사선을 이용하여 조운을 실시 하였으나 완전히 극복될수 없었다.따라서, 세조 때에는 관선으로 조운하도록 하였고 아울러 각 조창에서 갖추어야 할 조운선 수를 법제화하는 한편 개수연한과 조운선관리규정을 정하여 비로소 조운제도르르 정립하였다. 조운을 실제 담당해야 할 조졸로서 사공․격군의 구별이 있는데, 사공은 선장, 격군은 선원에 해당되고 특히 수운에 속한 조졸을 수부라하였다. 이들은 세습직이었으며 본래 신분은 양인이나 누구나 기피하는 천역에 종사하기 때문에 신량역천에 속하는 계층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그 역이 고되어 도망하는 자가 많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추쇄작업을 다각적으로 벌이고, 해안가 거주민 중 수로에 익숙한자를 강제로 징발하기도 하였다.또한, 면역의 특혜를 주거나 급료를 지급하는 전업적인 조졸을 확보하기 이하여 이를 법제화시켰다. 한편, 빈번한 해난 사고는 재정상의 손실뿐아니라 익사로인한 인명피해로 조졸확보에 큰 문제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 해난사고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평소 사고가 많고 위험한 지역인 서산 안흥량과 강화수로의 손돌항 일대에운하를 만들어 위험지역을 회피하려는 노력이 고려시대이래 계속 되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세조 때를 전후하여 계화된 관선 중심의 조운체제는 15세기말에 나타난 사회적․경제적 변화와 함께 점차 동요하게 되었다.
즉, 수포대역제의 성행으로 인한 역제의 문란은 고역의 조졸들에게 역의 기피 현상을 가속화시켰고, 또 관장제의 붕괴로 선박건조가 어렵게 되었으며, 상업활동과 연안어업의 꾸준한 성장 속에서 사선소유자를 중심으로 사선활동이 활발하여져서 국가에서는 조운의 운영을 점차 사선에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사선은 관선에 비하여 기능이 우수하였고, 또 정부의 입장에서 조졸의 확보, 조선의 건조라는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간섭할 필요가 없어 더욱 유리하였던 것이다.이런 가운데 집권화를 꾀하던 당시 위정자들은 조운에서도 이를 계속 관철하려고 노력했다.그래서 부족한 조운선은 병선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해난사고를 줄이기 위하여 이납론을 추진하였다. 이의 대표적인 예는 전라도 영산창을 폐쇄하고, 군산창을 신설하는 것이었다.이는 전에 영산창에 소속된 각읍의 세곡을 영광 법성창에 이납시키는 한편, 법성창 소속의 홍덕․부안․고부․정읍 등 제읍의 세곡을 덕성창의 후신인 군산창에 이납하게 하여 사고다발지역인 전라도 서해안을 피함으로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의 관선 중심 조운체제는 임진왜란을 격고 나서 그 기능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조운량이 증가되자 기존의 조운시설로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즉, 지토선․경강사선․주교선․훈국선 등을 이용하여 운반하는 방법이었다.지토선은 조창에 정속되지 않은 각 읍의 지방선으로, 영조 때 영남3창이 설치되기 전에는 지토선을 경강선인들에게 조급하여 세곡을 운반하였다가. 경기도․강원도․황해도 지역일대에는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지토선으로 조운하는 읍이 매우 많았으며, 지토선이 부족한 경우 조교선등 다른 선박을 임선하기도 하였다. 주교선은 주교사 소속의 서박으로 정조 때 이후 국왕행차시 한강 도강을 위한 주교로 사용되었으나, 조창에 소속되지 않은 곳에서 지토선이 부족한 경우 주교선을 임선하여 세곡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양호지방의 많은 세곡이 주교선으로 운반되었다.훈국선은 훈련도감 소속 선박으로 본래 군사적 목적에 사용되는 선박이지만 조운기에는 세곡운반에 이용되어 지급받는 선가를 경비수요에 충당하였다. 경강사선은 개인소유의 선박으로 조선 후기에는 주로 경강사선이 조운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이는 한강일대의 객주, 여각으로 불리는 경강상인 또는 사공 가운데 수령적인 도사공들이 주로 소유하였는데, 조선 후기 대동법의 실시에 따른 세곡량의 증대와 제도 및 기강의 문란으로 경강사선이 조운에 크게 이용되었다.경강사선에 크게 의존하였던 조선 후기 조운의 고질적인 병폐인 지방관리와 사공들간의 결탁으로 인한 조세횡령, 잦은 해난사고, 경창 도착의 지연 등 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으나, 개항이후 서양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조운선을 기선으로 대체 운영함으로써 이러한 병폐를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뒤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세곡운송이 불필요하게 되어 조운제도는 서서히 폐지되었다.